미래는 보는여자,생각을 읽는 남자

목차

    소설 블로그 템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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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세상의 모든 소리와 보이지 않는 내일

    여기, 세상의 소음 속에서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듣는 남자가 있다. 김민준. 서른 해를 살아오는 동안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착한’, ‘성실한’ 같은 밋밋한 수식어만 붙었다. 평균보다 조금 모자란 외모, 어수룩하다 못해 때로는 답답해 보이는 성격. 그에게 연애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고, 여자의 마음은 난해한 외국어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아주 가끔, 파장이 맞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생각이 짧은 단어처럼 뇌리에 스며들 때가 있었다. *‘아, 저 후배… 발표 때문에 긴장했구나.’* *‘부장님은 오늘 저녁 메뉴 때문에 고민이시네.’* 능력이라기엔 너무나 사소하고 불규칙했지만, 이 쓸모없는 재능 덕분에 그는 타인의 곤란함을 먼저 알아채고 조용히 돕는, 그저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아무도 그를 남자로서는 봐주지 않았다. 오늘 밤, 바로 이 순간까지는. *** 그리고 여기, 고요함 속에서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보는 여자가 있다. 한서아.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었다. 눈부신 외모, 유복한 집안, 명석한 두뇌까지. 세상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허락했지만, 정작 그녀는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았다. 특히 ‘연애’라는 감정 소모에는 지독할 정도로 무관심했다. 그녀에게도 비밀이 하나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뜰 때, 혹은 무언가에 집중할 때, 바로 눈앞에 3초에서 5초 남짓의 단편적인 미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아, 저 차… 곧 급정거하겠네.’* *‘곧 쏟아질 커피. 피해야겠다.’* 미래를 보는 능력은 그녀의 삶을 흠집 하나 없이 완벽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의 설렘을 앗아갔다. 시작을 알면 과정이 지루했고, 결과를 보면 감정이 무뎌졌다. 그렇게 그녀의 세상은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안전하고, 또 지독하게 재미없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세상에서, 서로의 존재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었다. 아주 흔한 회식과, 아주 흔하지 않은 방송 촬영이 두 사람의 궤도를 잔인할 정도로 강하게 충돌시키기 전까지는. --- ###

    1장: 인생 최고의 날, 그리고 최악의 아침

    시끌벅적한 고깃집, 자욱한 연기와 알싸한 소주 냄새가 뒤섞인 공간에서 김민준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 다시없을 기적 같은 밤이었다. “선배, 저 사실… 오래전부터 선배 지켜봤어요. 항상 다정하고, 묵묵히 챙겨주는 모습…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파릇파릇한 신입 후배, 지은이 발그레한 볼로 수줍게 고백해왔다. 민준이 어색하게 웃으며 잔을 채워주려던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야, 김민준. 너 아직도 나 기억하냐?” 이번엔 동갑내기 경력 사원이자, 민준의 까마득한 첫사랑이었던 유라였다. 짓궂은 미소를 지은 그녀가 민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나 사실 너 때문에 우리 회사 지원한 거면… 믿을래?” 왼쪽에서는 풋풋한 설렘이, 오른쪽에서는 아련했던 추억이 그를 향해 돌진했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지?’* 민준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버렸고,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 두 여자의 진심 어린 생각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제발… 부담스러워하지만 않았으면…!’* (지은) *‘어릴 땐 놓쳤지만, 이번엔 진짜 내 걸로 만들 거야.’* (유라) 꿈결같은 시간이었다. 2차로 자리를 옮기자는 부장의 외침에 모두가 우르르 일어섰다. 민준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계산대 앞에서 잠시 머뭇거린 사이 인파에 휩쓸려 일행을 놓치고 말았다. 취기가 머리끝까지 오른 그는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섰지만, 이미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필름이 끊기기 직전, 그는 길 건너편 불 켜진 24시간 카페의 푹신한 소파를 발견했고, 그대로 빨려 들어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자, 스탠바이! 조명 좀 더 밝게! 1번 출연자분 곧 들어오십니다!” 익숙하지 않은 소음과 눈을 찌르는 강렬한 빛에 민준은 억지로 눈을 떴다. 어젯밤의 조용한 카페가 아니었다. 거대한 카메라와 조명,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거대한 촬영장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저… 저기요… 여긴…” “아, 일어나셨어요? 어제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 저희가 깨우지 말라고 했어요.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상대 여성분 곧 들어오십니다.” 어리둥절한 민준을, 작가로 보이는 한 여자가 당연하다는 듯 맞은편 자리에 앉혔다. 여기가 어디고, 무슨 상황인지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내가 왜 ‘출연자’가 된 거지? 해명할 틈도 없이, 카페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들어섰다. 한서아.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그러모아 빚은 듯한 여자였다. 화려하다기보다는 기품이 흘렀고, 차가워 보이지만 눈을 뗄 수 없는 기묘한 매력이 있었다. 민준은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행색인지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어젯밤의 고기 냄새와 술 냄새가 밴 셔츠, 까치집이 된 머리. 최악이었다. 한편, 민준의 맞은편에 앉은 서아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아니었으면 정말… 이걸 왜 하고 있는 거야.’* 방송국 PD인 친구의 강권에 억지로 끌려 나온 맞선 프로그램. 그녀는 그저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갈 생각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솔직히 말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멍한 표정, 촌스러운 옷차림,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태도까지. 그렇게 남자를 한심하게 훑어보던 서아의 눈에, 찰나의 미래가 스쳤다. **[…밤의 한강 공원. 가로등 불빛 아래, 눈앞의 남자가 서툰 손길로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손길에 기댄 채 세상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불안이 사라진 듯한, 완벽한 평온의 미소였다…]** “…!” 순식간에 지나간 5초의 미래. 서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말도 안 돼. 내가? 저 남자 앞에서 울고, 저 남자 때문에 웃는다고? 지독하게 재미없던 그녀의 세상에, 처음으로 예측 불가능한 균열이 생겼다. 흥미로웠다. “저기요.” 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민준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술… 덜 깨신 것 같은데. 일단 뭐라도 좀 마실래요?” 서아는 호기심을 담아 대화를 시도했지만, 민준은 그저 패닉 상태였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저는 출연자가 아니라고, 어제 술에 취해 잠들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의 입은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아… 저, 그게… 그러니까 저는…” “네? 잘 안 들리는데.” 민준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의 귓가로 서아의 날카로운 생각이 스며들었다. *‘뭐야, 이 남자. 말하는 법도 잊어버렸나? …근데, 왜 자꾸 아까 그 미래가 신경 쓰이지?’* 민준은 안절부절못했고, 서아는 알 수 없는 미래의 잔상에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에게 ‘최악’이라는 인상만을 남긴 채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 그로부터 일주일 후. 악몽 같던 방송국 해프닝을 겨우 잊고 출근한 민준의 팀에, 신임 팀장이 발령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회의실 문으로 쏠렸다. “새로 온 한서아 팀장님입니다. 다들 박수로 맞아주세요.” 문이 열리고, 그곳에는 일주일 전 카페에서 마주쳤던, ‘미래를 보는 여자’ 한서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민준을 발견하곤, 아주 잠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민준의 머릿속에, 그날처럼 그녀의 생각이 선명하게 울렸다. *‘…내 미래에 있던 남자가, 왜 여기에?’* 그렇게, 서로의 비밀을 모르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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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최악의 상사, 혹은 미래의 남자

    *‘…내 미래에 있던 남자가, 왜 여기에?’* 한서아의 날카로운 생각이 뇌리에 못처럼 박힌 채, 김민준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회의실의 공기가 순간 멈춘 것 같았다. 다른 팀원들은 새로운 팀장의 압도적인 아우라에 감탄하거나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민준에게는 그 무엇도 들어오지 않았다. 세상이 빙글 도는 것 같았다. ‘미래? 미래라니? 내가 뭘 잘못 들은 건가? 하긴, 그럴 리가 없지. 그날 아침의 끔찍한 악몽 때문에 헛것을 들은 게 분명해.’ 민준은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제발, 저 여자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기를. 술에 취해 카페에서 잠든 추레한 남자와, 지금 말끔한 (그러나 잔뜩 주눅 든) 회사원 김민준을 연결 짓지 못하기를.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부터 마케팅 2팀을 맡게 된 한서아입니다.” 서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이상한 힘이 있었다. 짧은 자기소개와 함께 그녀는 팀의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팀원들의 얼굴에 조금씩 감탄과 경외감이 어렸다. 그녀는 프로였다.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일에 집중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날 아침과는 또 다른,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풍겼다. 시선이 마주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서아는 팀원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던 중, 민준의 차례에서 아주 미세하게, 찰나의 시간 동안 멈칫했다. 그것은 ‘어디서 본 사람인데?’ 하는 의아함이 아니었다. 마치 아주 중요한 퍼즐 조각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민준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다시 시선을 피했다. 그 짧은 순간, 서아의 머릿속은 누구보다 복잡했다. ‘말도 안 돼. 정말 이 남자였어. 내 미래에, 그렇게 선명하게 보였던… 하지만 왜 하필 내 팀에? 그것도 저렇게 자신감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그녀의 완벽하게 통제된 세상에 나타난 유일한 변수. 서아는 혼란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 확인하고 싶어졌다. 저 남자가 정말 자신의 미래에 그토록 큰 영향을 끼칠 인물인지, 아니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해프닝일 뿐인지. “그럼 업무 파악을 위해, 오늘 오후 각 담당자와 10분씩 개별 면담을 진행하겠습니다. 김민준 씨부터 시작하죠.” 첫 번째로 지목된 이름에 민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오후 2시, 팀장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민준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못했다. 서아는 민준의 인사 파일을 넘겨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류가 넘어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김민준 씨.” “네, 네! 팀장님!” “입사 5년 차. 인사고과도 나쁘지 않고, 동료 평가도 항상 좋군요. ‘성실하고 책임감 있다’… 다들 그렇게 평가하는데.” 서아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민준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정작 본인은 왜 그렇게 자신이 없어 보이죠?” 정곡을 찔린 민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서류를 든 서아의 손을 보고 있던 그녀의 눈에, 또다시 미래의 편린이 스쳤다. **[…어두운 밤, 사무실. 모니터 불빛에 의지해 민준이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지금과 달리 자신감으로 반짝이고 있었고, 서아 자신은 그의 설명에 빠져들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논리 정연한 설명에 감탄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 남자에게 저런 면이?’ 미래의 단서는 또다시 현재의 모습과 극명한 괴리를 보였다. 서아는 자신도 모르게 시험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책상 한쪽에 먼지가 쌓여가던 프로젝트 파일을 꺼내 민준 앞으로 밀었다. “이거, ‘밸런타인 키즈’ 프로젝트. 전임 팀장도 손을 놓은 문제의 프로젝트죠.” 팀 내 모두가 기피하는, 실패가 예정된 프로젝트였다. 민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가 검토해 보니, 접근 방식이 잘못됐더군요. 김민준 씨가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한번 기획안을 짜봤으면 합니다. 기한은… 내일 아침까지.” “네? 내, 내일 아침까지요?” “네. 못하겠어요?” 그것은 단순한 업무 지시가 아니었다. 명백한 도발이자, 시험이었다. 팀원 누구라도 불가능하다고 말할 만한 지시. 민준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입을 여는 순간, 그의 귓가에 그녀의 생각이 스며들었다. *‘보여줘 봐요. 당신이 정말 내 미래를 바꿀 만한 남자인지, 아니면 그냥 착하기만 한 남자인지.’* 그것은 악의가 담긴 생각이 아니었다. 순수한 호기심과, 어쩌면 작은 기대감이 섞인 목소리였다. 민준은 팀장실을 나온 뒤에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주변 동료들이 괜찮냐며 위로를 건넸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두가 생각했다. ‘새 팀장이 첫날부터 본보기로 사람 하나 잡는구나.’ 하지만 민준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날 밤, 인생 처음으로 두 여자에게 고백을 받았던 순간의 설렘. 그리고 지금, 자신을 시험대에 올린 저 차가운 상사의 기묘한 기대감. ‘그냥 착하기만 한 남자…’ 그것은 평생 그를 따라다닌 꼬리표였다. 그는 늘 괜찮다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민준은 자리로 돌아와 ‘밸런타인 키즈’ 프로젝트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도망치지 말자. 보여주자.’ 그날 밤, 모두가 퇴근한 텅 빈 사무실에 민준만이 남아 모니터 불빛을 밝혔다. 이것은 단순히 하룻밤의 야근이 아니었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한 그의 첫 번째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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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얼음 여왕의 균열과 새로운 바람

    김민준은 밤을 새워 만든 기획안을 들고, 마치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한서아 팀장의 책상 앞에 섰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운 탓에 머리는 멍했고, 심장은 불안하게 요동쳤다. “…보겠습니다.” 서아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기획안을 받아 들었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이 민준의 애간장을 태웠다. 그녀의 날카로운 질문이 시작된 것은 10분쯤 지났을 때였다. “타겟 연령층을 기존 30대 부모에서 20대 후반의 이모, 삼촌까지 확장한 근거는 뭐죠? 예산 낭비가 될 수 있습니다.” “핵심 카피가 너무 감성적입니다. 우리 브랜드의 지향점과 맞지 않아요.” 질문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민준은 주눅이 들기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젯밤 내내 자신이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부분들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펴고 입을 열었다. “타겟 확장은 단순한 판매 증대가 목적이 아닙니다. 아이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젊은 세대의 ‘조카 바보’ 문화를 공략해, 브랜드 이미지를 더 젊고 트렌디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초기 비용은 들겠지만 장기적인 효과는…” 어느새 민준은 긴장을 잊고 있었다. 어수룩한 회사원 김민준이 아닌, ‘밸런타인 키즈’ 프로젝트에 누구보다 깊이 몰입한 기획자로서 자신의 논리를 펼쳐나갔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서아는 대답 없이 민준을 빤히 바라봤다. 그녀의 머릿속에, 어제 보았던 미래의 단편—자신감 넘치게 브리핑하던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정말이네. 이 남자, 그냥 착하기만 한 게 아니었어.’* 한참의 침묵 끝에, 서아가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네요.” 그녀는 기획안 첫 장에 붉은 펜으로 사인을 하며 덧붙였다. “이대로 진행하세요. 프로젝트 책임자는 김민준 씨입니다.” 민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팀장실을 나서자마자, 복도에서 훤칠한 키의 한 남자와 마주쳤다. 마케팅 1팀의 팀장이자, 사내의 모든 여직원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는 에이스, 최강혁이었다. 민준과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인 남자였다. “어, 민준 씨. 한 팀장님한테 깨지고 나오는 길인가? 얼굴이 흙빛인데.” 강혁은 민준의 어깨를 친근하게 툭 치며 웃었다. 그의 말에는 걱정하는 척하지만 은근한 무시가 배어 있었다. 그는 민준을 지나쳐 자연스럽게 서아의 팀장실 문을 열었다. “한 팀장, 너무 우리 민준 씨 잡는 거 아니야? 내가 아끼는 후배인데.” 민준의 자리로 돌아오자, 옆자리 동기인 박준호 대리가 호들갑을 떨며 말을 걸어왔다. 사내 모든 소문의 시작과 끝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야! 살아 돌아왔냐? 저 얼음 여왕이 뭐래? 근데 방금 최강혁 팀장 봤어? 저 인간은 또 왜 저래. 한 팀장 오자마자 엄청 껄떡대는 거 알아?” “그런가…” “하여튼 저 완벽한 척하는 인간은 재수 없어. 그건 그렇고, 너 밤새웠다며? 얼굴 좀 봐라. 가서 커피라도 한 잔…” 준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앳된 얼굴의 신입사원 지은이 비타민 음료를 들고 민준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선배님… 어제 밤새우셨다고 들어서요. 이거 드시고 힘내세요!” 진심이 담긴 걱정에 민준이 고마움을 표하며 음료를 받아 들려는 순간이었다. 익숙한 향수 냄새와 함께 또 다른 여자가 나타났다. 그의 첫사랑, 유라였다. “김민준, 너 아직도 이런 거 마시냐? 피곤할 땐 제대로 된 커피를 마셔야지.” 유라는 지은이 내민 비타민 음료를 보란 듯이 무시하며, 민준의 책상에 스타벅스 커피를 탁 내려놓았다. 그녀는 지은을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은 씨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보네. 남자들은 이런 거보다 카페인 수혈이 직빵인데.” 순간, 세 사람 사이에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지은의 얼굴은 살짝 굳었고, 유라는 여유만만했다. 정작 그 신경전의 중심에 있는 민준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두 사람의 호의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아… 고마워. 둘 다.” 그의 둔한 대답에 유라는 피식 웃었고, 지은은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박 대리만이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찾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한서아라는 강력한 태풍이 몰고 온 변화는, 이제 민준의 업무뿐만이 아닌 그의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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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보이지 않는 전쟁의 서막

    ‘밸런타인 키즈’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된 김민준의 하루는 전쟁 같았다. 하지만 그 전쟁은 이상하게도 그를 위축시키는 대신, 조금씩 잠자고 있던 그의 능력을 깨우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자신의 의견을 숨기지 않았다. 변화는 주간 전체 회의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최강혁 팀장이 이끄는 1팀이 화려한 PPT와 완벽한 실적 데이터를 발표하며 모든 임원들의 찬사를 받은 직후, 민준의 발표 차례가 돌아왔다. 모두가 실패했다고 낙인찍었던 프로젝트. 모두의 시선에는 기대보다 우려가 가득했다. “안녕하십니까. ‘밸런타인 키즈’ 리뉴얼 프로젝트를 맡은 김민준입니다.” 떨리는 첫마디와 달리, 그의 발표는 논리 정연했다. 그는 데이터를 넘어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진 보편적인 감성을 건드리는 그의 기획에, 회의실의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발표가 끝나자, 강혁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질문을 던졌다. “아이디어는 신선하군요, 민준 씨. 하지만 너무 감성에만 치우친 전략은 위험부담이 큽니다. 괜한 모험으로 팀의 리소스를 낭비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은 고려해 보셨는지요?” 모두의 앞에서 후배의 도전을 격려하는 듯했지만, 실은 ‘너는 아직 아마추어’라고 선을 긋는 교묘한 공격이었다. 민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무어라 대답하려던 순간, 회의 테이블 가장 끝에 앉아 있던 서아가 입을 열었다. “그 모험이 지금 우리 회사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최 팀장님.”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결과는 나와봐야 아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이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그녀는 민준을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명백히 민준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강혁의 완벽한 미소에 처음으로 미세한 균열이 갔다. 그날 저녁, 퇴근 시간이 되자 유라가 민준에게 다가왔다. “오늘 발표 멋있었어, 김민준. 완전 다시 봤네. 내가 제대로 된 커피 사기로 한 약속, 오늘 지킬게.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유라의 적극적인 태도에 민준이 거절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지은이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서, 선배님! 죄송한데 이 데이터 정리 좀 한번만 봐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아무리 해도…” 지은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누가 봐도 퇴근을 막으려는 의도가 뻔했지만, 민준의 착한 성정은 그녀의 부탁을 외면하지 못했다. “아… 유라야, 미안한데 이것만 잠깐 봐주고…” 유라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는 것을, 민준은 또 눈치채지 못했다. 바로 그 시각, 팀장실에서 나온 서아는 복도에 선 세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자신 때문에 곤란해하는 민준과, 그를 사이에 두고 보이지 않는 스파크를 튀기는 두 여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왜 신경이 쓰이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프로젝트 책임자가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는 게 싫다고 합리화할 뿐이었다. 그녀가 그들을 지나쳐 주차장으로 향하려던 순간, 또다시 눈앞에 섬광이 터졌다. **[…세차게 비가 쏟아지는 밤거리. 자신은 비를 쫄딱 맞고 있으면서도, 민준은 큰 우산을 그녀 쪽으로 완전히 기울여주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손이, 불안하게 떨리는 자신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그의 옆모습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든든하게 느껴졌다…]** “…….” 서아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짧게 숨을 골랐다. 미래는 언제나 그녀에게 결과를 알려주었지만, 과정의 설렘을 앗아갔다. 하지만 이 남자를 향한 미래는 달랐다. 결과를 알아도, 그 과정이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결심을 굳힌 그녀는 차갑고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한편, 지은의 일을 겨우 봐주고 유라에게 사과하며 함께 회사를 나서려던 민준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팀장 한서아] “김민준 씨, 주말에 시간 됩니까? 프로젝트 관련해서 현장 답사할 곳이 있습니다. 단둘이.” ‘단둘이.’ 그 두 글자가 민준의 심장을 향해 날아와 박혔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은 업무 지시인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가. 차가운 얼음 여왕의 예측 불가능한 한 수가, 모든 판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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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장: 보통 남자의 비상식적 주말

    ‘단둘이.’ 한서아 팀장이 보낸 메시지의 마지막 두 글자가 김민준의 망막에 낙인처럼 찍혔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발끝까지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단둘이? 오타인가? 아니면… 무슨 함정이지? 주말에 단둘이 현장 답사를 가서, 자연스럽게 해고 통보를 하려는 건가? 아니야, 그건 너무 드라마 같은 생각이잖아. 그럼 설마… 데이트? 말도 안 돼. 저 한서아 팀장이 나 같은 놈이랑 왜. 이건 분명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업무의 연장선일 거야. 그래, 백 퍼센트 그거야.’* 스스로를 필사적으로 세뇌하며,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보냈다. [네, 알겠습니다. 시간과 장소 알려주시면 맞춰 가겠습니다.] 지극히 사무적이고, 지극히 정상적인, 그래서 지금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는 온갖 비상식적인 상상과는 전혀 다른 답변이었다. 곁에 있던 유라와 지은이 그의 굳은 표정을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그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급한 업무 연락’이라는 어색한 변명만 남긴 채, 그는 도망치듯 회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약속의 토요일.** 민준은 옷장 앞에서 스무 살 이후 처음으로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미치겠네. 뭘 입고 가야 하지? 정장은 완전 오버하는 놈처럼 보일 거고, 그렇다고 너무 편하게 입으면 성의 없어 보이겠지? ‘꾸안꾸’라던데, 꾸민 듯 안 꾸민 듯. 그게 대체 뭔데! 그냥… 제일 깨끗하고 무난한 걸로 입자. 괜히 튀어서 좋을 거 하나 없어.’* 결국 그는 여러 번 다려 각이 잡힌 면바지에 깔끔한 셔츠를 입는 것으로 타협했다. 약속 장소인 대형 쇼핑몰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서 있는 서아를 보고 숨을 멈췄다. 늘 완벽한 오피스룩으로 온몸에 갑옷을 두른 듯했던 그녀는,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를 가볍게 묶은 모습은 ‘팀장님’이 아닌, 그냥 ‘한서아’라는 여자로 보이게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민준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이잖아. 사무실에 있을 때보다 열 배는 더… 다가가기 힘든 느낌이야. 저런 사람이랑 내가 단둘이 현장 답사라니. 오늘 하루, 제발 아무 실수 없이 무사히 지나가게 해주세요.’* “늦지 않았네요, 김민준 씨.” 서아가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 둘러볼 곳은 여기 쇼핑몰 안에 있는 키즈 카페와 대형 완구점입니다. 실제 부모와 아이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직접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역시, 완벽한 업무였다. 민준은 조금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주 미세하게 실망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키즈 카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부모들의 기합 소리가 뒤섞인 혼돈의 공간이었다. 서아는 익숙하지 않은 소음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관찰하며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민준 역시 긴장을 풀고 그녀의 옆에서 아이들의 동선과 부모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팀장님, 저기 보시면…” 민준이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선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그녀의 생각이 흘러 들어왔다. *‘…굳이 둘이 올 필요는 없었는데. 비효율적이야. 혼자 왔어도 충분했을… 근데, 생각보다… 나쁘진 않네.’* 민준의 심장이 쿵, 하고 세게 울렸다. *‘비효율적? 역시 날 부른 걸 후회하고 있는 건가? 아니, 잠깐. ‘나쁘진 않네’라고? 그건 무슨 뜻이지? 내 존재를 겨우 견뎌주고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정말로 괜찮다는 건가? 도저히 모르겠다!’* 혼란스러운 생각에 그의 말이 순간 엉켰다. “아, 저… 그러니까 저쪽의 부모님들은 아이들보다 본인들이 더 재밌어하는… 그런 포인트가 의외의… 그…” 그가 허둥지둥 말을 마무리하려 할 때였다. 한 아이가 뛰어가다 민준의 다리에 그대로 부딪혀 넘어졌다. 아이의 울음이 터지기 직전,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낮춰 아이와 눈을 맞췄다. “어이쿠, 괜찮아? 기차가 칙칙폭폭하다가 살짝 부딪혔네. 우리 꼬마 기관사님, 다친 데는 없어요?” 그의 다정한 말투에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동그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민준이 장난스럽게 웃어주자, 아이는 이내 배시시 웃으며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그 모든 광경을, 서아는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민준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서는 순간, 또렷한 생각이 들려왔다. *‘아이를 잘 다루네… 정말… 다정한 사람이구나.’* 이번 생각은 달랐다. 업무적인 평가나 냉소적인 관찰이 아니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흘러나온, 담백하고 순수한 감상. 그 순간, 민준은 얼어붙었던 마음 한구석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다정한 사람… 그녀가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냥 어수룩하고 답답한 부하 직원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 봐준 건가?’* 작은 자신감이 가슴속에서 싹텄다. 민준은 처음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이들은 순수하니까요. 어른들처럼 복잡하게 생각 안 하잖아요.” 그의 말에 서아는 대답 대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잠시 그를 응시했다. 현장 답사를 마친 뒤, 그들은 쇼핑몰 카페에 마주 앉아 간단히 내용을 정리했다. 어색했던 처음과 달리, 대화는 의외로 순조롭게 이어졌다. 민준은 더 이상 그녀 앞에서 말을 더듬지 않았다. 헤어질 시간이 되어, 서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유익했어요, 김민준 씨. 도움이 됐습니다.” 사무적인 인사였지만, 민준은 왠지 그 말이 진심처럼 들렸다. 그녀가 등을 돌려 몇 걸음 걸어갔을 때, 민준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생각을 들었다. 그 생각은, 이전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렬하게 그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내가 봤던 미래… 어쩌면, 그렇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민준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미래를… 봤다고? 그때 사무실에서 들었던 생각도 ‘미래에 있던 남자’였어. 설마… 한 팀장님의 능력은 미래를 보는 건가? 그리고 그 미래에… 내가 있다고?’* 지금까지의 모든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는 듯한 충격. 그녀가 자신을 대하던 알 수 없던 태도, 불가능해 보였던 프로젝트를 맡긴 이유,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감싸주었던 말. 그 모든 것의 의미가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다. 서아의 모습이 인파 속으로 사라진 후에도, 민준은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보통 남자의 평범했던 주말이, 이제 막 거대한 비밀의 서막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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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장: 서투른 고백, 잔인한 오해

    주말 동안 김민준의 머릿속은 온통 한서아가 마지막으로 남긴 생각의 잔상으로 가득했다. *‘내가 봤던 미래… 어쩌면, 그렇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그건 단순한 생각을 넘어, 그의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수수께끼였다. 월요일 아침, 민준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출근했다. 더 이상 이 비밀을 안고 그녀를 팀장으로만 대할 수 없었다. 그건 기만이었다. 그녀가 미래를 보는 것처럼, 자신은 생각을 듣는다는 사실을 밝혀야만 했다. 그게 최소한의 예의이자, 이 기묘한 관계를 풀어나갈 유일한 열쇠라고 생각했다. *‘미쳤다고 하겠지? 아니면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날 잘라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말해야 해. 그녀의 미래에 내가 있다면, 그녀도 내 비밀을 알 권리가 있어. 이건… 비겁하게 숨길 일이 아니야.’* 그는 하루 종일 기회를 엿보다, 모두가 퇴근한 저녁 늦게서야 팀장실 문을 두드렸다. “팀장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서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민준은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감 속에서, 사무실 근처의 인적 드문 공원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두 사람을 비췄다. “김민준 씨, 할 얘기가 뭐죠? 업무 이야기라면 내일…” “업무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준은 그녀의 말을 끊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팀장님. 제가… 아주 가끔이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립니다.” 서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민준은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절대 들으려고 해서 들리는 게 아닙니다. 그냥… 파장처럼 스며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팀장님께서 저에 대해 생각하셨던 것들, 그리고… 미래를 보신다는 것까지… 알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고요한 공기에 민준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이해나 놀라움이 아닌, 싸늘하게 얼어붙은 분노였다. 서아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들었다고? 내 생각을? 내가 이 남자를 보고 미래를 떠올렸던 것, 혼란스러워했던 것, 시험해봤던 것까지 전부…?’* 그것은 단순한 비밀의 공유가 아니었다. 자신의 가장 깊고 사적인 영역이 침범당했다는 끔찍한 불쾌감과 수치심이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내면의 세계가, 이 어수룩해 보이는 남자에게 속수무책으로 읽혔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이 치밀었다. “김민준 씨.” 그녀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 능력이란 게 사실이든 아니든, 두 번 다시 그따위 소리 입에 담지 마세요. 그리고 감히 내 사적인 영역을 아는 척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내 팀원일 뿐이고, 나는 당신의 상사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녀는 경멸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를 한번 쏘아보고는, 그대로 뒤돌아 차갑게 멀어져 갔다. 민준은 그 자리에 홀로 남아, 산산조각 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채 망연자실 서 있었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던 둘의 사이는, 그의 가장 솔직한 고백으로 인해 이전보다 훨씬 더 깊은 심연으로 멀어져 버렸다. **다음 날부터 사무실은 지옥이 되었다.** 서아는 민준을 완벽하게 없는 사람 취급했다. 업무 보고는 오직 메일로만 받았고, 그가 있는 자리에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민준은 죄인처럼 숨 막히는 시간을 보냈다. 그의 망가진 마음을 파고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여자들의 걱정이었다. 점심시간, 탕비실에서 멍하니 서 있는 민준에게 지은이 다가왔다. “선배님, 어디 안 좋으세요? 팀장님한테 깨졌어요? 얼굴이 너무 안 좋아요…” 그 순간, 지은의 순수한 걱정이 민준의 뇌리에 흘러 들어왔다. *‘어떡해, 정말 힘들어 보여… 내가 뭐라도 해드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거절과 경멸에 상처받은 민준에게, 그 꾸밈없는 걱정은 가뭄의 단비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지은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야, 지은 씨.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걱정해줘서 정말 고마워.” 마침 탕비실을 지나던 서아의 눈에 그 광경이 들어왔다. 다정하게 웃는 민준과, 그 미소에 얼굴을 붉히는 지은. 서아의 머릿속에 차가운 의심이 싹텄다. *‘…저것도 저 능력 때문인가? 여자의 생각을 읽고, 그에 맞춰 행동해서 환심을 사는 건가? 순진한 사람을 상대로….’* 오해는 퇴근길에 확신으로 굳어졌다. 회사 앞에서 유라가 민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민준, 너 요새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무슨 일 있지? 오늘 나랑 술 한잔하자. 다 들어줄게.” 민준이 망설이는 순간, 유라의 절박한 생각이 들려왔다. *‘여기서 거절당하면 진짜 창피한데… 제발. 너한테 정말 힘이 되어주고 싶단 말이야.’* 그녀의 자존심과 진심을 동시에 읽은 민준은, 지금의 괴로움을 잠시라도 잊고 싶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팀장실 창문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서아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어린 후배에 이어 이번엔 옛 첫사랑인가. 여자들의 마음을 읽고,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면서 자신에게 넘어오게 만드는 거였어. 내가 봤던 미래의 다정한 모습도, 결국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낸 연기였을 뿐이야. 정말… 혐오스러워.’* 그녀는 민준이라는 존재 자체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 미래의 단편에 잠시 흔들렸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때,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서아야, 이번 주말에 선 자리 하나 잡아 놨다. HS그룹 장남이다. 이번엔 빠질 생각 마라.” 평소 같았으면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민준에 대한 배신감과 혐오감에 지쳐버린 그녀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어차피 미래 따위, 능력 따위, 다 믿을 수 없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

    7장: 예언이 현실이 되는 밤

    약속된 맞선 장소에 나간 한서아는, 상대방 남자가 내뱉는 말을 들으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남자는 재력을 과시하는 것을 시작으로, 은근히 그녀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말을 이어갔다. “서아 씨는 능력도 좋고 참 대단하시네요. 하지만 뭐, 결혼하면 여자 일은 그저 취미 생활이죠. 아내는 남편 내조 잘하고, 집안 살림이나 하는 게 진짜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 집안에 들어오려면 지금 하는 일은 당연히 그만둬야 할 겁니다.” 서아의 자존심이 발밑에서부터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싸늘하게 남자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제 취미 생활이, 당신의 일생일대 업적보다 훨씬 가치 있을 것 같군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분노로 머릿속이 들끓었다.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자신의 삶을 왜 타인에게 재단 받아야 하는지 억울했다. 화를 삭이지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걷던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 거세게 부딪치며 지나갔다. 순식간에 손에 있던 핸드백이 사라졌다. “저기요!” 소리쳐봤지만, 날치기범은 이미 오토바이를 타고 인파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지갑, 휴대폰, 차 키… 모든 것이 사라졌다. 화려한 레스토랑에 어울렸던 불편한 하이힐은, 이제 그녀에게 족쇄가 되었다. 택시를 잡을 수도, 누구에게 연락할 수도 없었다. 서아는 결국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까지고 물집 잡힌 발의 고통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물리적인 고통은 꾹꾹 눌러왔던 감정의 둑을 무너뜨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에 익숙한 한강의 야경이 펼쳐졌다. 그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강변 벤치에 주저앉았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맞선남에 대한 분노, 날치기범에 대한 황당함, 그리고… 김민준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완벽하게 통제되었던 그녀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결국 그녀는 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울었을까. 눈물로 흐려진 시야 앞으로, 누군가 하얀 손수건을 내밀었다.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서 있었다. 김민준. 그는 늘 입던 답답한 셔츠가 아닌, 편안한 후드티 차림이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다는 듯,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서아의 머릿속에 첫 번째 예언의 파편이 섬광처럼 터져 나왔다. **[…밤의 한강 공원. 가로등 불빛 아래, 눈앞의 남자가 서툰 손길로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손길에 기댄 채 세상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황도, 장소도, 인물도… 모든 것이 예언과 똑같았다. 민준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손수건을 받아 들자, 조금 떨어진 곳에 조용히 앉았다.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주려는 듯, 그는 말없이 흐르는 강물만 바라봤다. 그 침묵이,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서아의 마음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서아는 눈물을 닦으며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했던 남자. 여자의 마음이나 훔치고 다니는 사기꾼이라고 단정했던 남자. 바로 그 남자가, 자신의 가장 비참하고 약한 순간에, 운명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전보다 훨씬 더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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